강남순교수
< 기독교, 예수의 흔적은 어디 있는가>
==중앙일보 [중앙시평-5] 2020년 11월 5일==
1. 이번 칼럼은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미국의 대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가지게 된 생각을 담았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가짜뉴스나 선동적 프로파겐다가 종교와 정치 세계를 물들이고 있다. 특히 한국이나 미국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종교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은 참으로 심각하다. 여러 통계가 나왔지만 여성혐오, 인종혐오, 난민혐오, 성소수자혐오, 빈곤층 혐오 등 갖가지 혐오의 화신인 트럼프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위 '백인-복음주의-기독교인'들이다. 만약 이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2016년에 트럼프가 당선되는 이변은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분석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있다.
2. 여성의 자기 결정권문제인 인공유산문제, 성소수자의 인권문제, 타종교와의 공존의 가치를 반대하는 이들이 바로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소위 진보성향의 가톨릭교도들도 인공유산 문제나 성소수자 이슈로 많은 이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불가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 인류의 역사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것은 내면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종교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종교인들은 바로 사회의 구성원들이기에 그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정치인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지면길이의 제한 상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다시 경험하지만, 종교(특히 기독교)-사회-정치의 상관관계는 이 세계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제이다.
4. 나의 칼럼이 전통적인 방식의 기독교 이해를 하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글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강연을 할 때도 그렇지만, 공적 지면에서 칼럼을 쓰는 이유를 나는 '불편함의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불편함의 경험' 없이 새로운 인식지평의 확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불편함'을 만들어내는가? 나 개인의 권력·이득 확장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평등한 인간으로 취급받는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를 위해서. 나는 혐오와 배제가 아닌, 포용과 연민, 평등의 세계에서 살고 싶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나의 삶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행복과 안녕'을 확장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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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본문에서>
“오직 한 명의 기독교인이 있었으며,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어느 철학자의 탄식이다. 예수는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고자 했는데, 기독교는 그 예수와 상관없는 권력 집단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기독교와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이 철학자의 탄식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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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의 사유세계를 지배하는 독재자 역할을 했던 중세 기독교가 면죄부를 팔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를 종교재판에 넘겼던 것처럼, 21세기 한국의 기독교는 ‘예수’와 ‘구원’을 면죄부처럼 팔면서 다층적 혐오정치를 기독교와 일치시키고 있다. 예수는 사회의 가장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 사랑, 환대를 가르치고 실천하면서, 평생 노숙인의 삶을 살았다. 그 예수정신 속에 종교의 차이, 성적 지향의 차이, 성별의 차이, 또는 피부색이나 국적의 차이 등을 근거로 한 파괴적 혐오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근원적인 자성적 비판과 단호한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한국의 기독교는 ‘예수’라는 상표는 사용하지만, 그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예수 주식회사’로 몰락할 뿐이다.
[중앙시평] 기독교, 예수의 흔적은 어디 있는가
[중앙일보] 입력 2020.11.05 00:33 | 종합 3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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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오직 한 명의 기독교인이 있었으며,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어느 철학자의 탄식이다. 예수는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고자 했는데, 기독교는 그 예수와 상관없는 권력 집단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기독교와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이 철학자의 탄식을 떠올리게 된다.
타 종교 정죄와 성소수자 혐오
남성우월주의와 물질지상주의는
예수 정신을 배반하는 것
‘예수 주식회사’로의 몰락 피해야
10월 14일 경기도 남양주 수진사에서 한 기독교인의 방화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다. 방화자는 평소에도 사찰에 온 사람들에게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을 믿으세요”하며 법회를 방해하였다. 2016년 1월에는 한 기독교인이 경북 김천 개운사에서 “미신이고 우상”이라며 불상과 불당을 파괴한 사건이 있었다. S 교수는 이 사건에 대하여 사과하고 불상 재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했다. 이 일로 그는 18년 동안 가르치던 신학 대학에서 2017년 파면이 되었다. 그는 파면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냈고, 2019년 서울고법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대학은 2020년 11월인 지금까지도 그의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10월 15일 기독교 감리회 경기연회 재판위원회에서는 L목사에게 정직 2년을 선고했다. 이뿐이 아니다.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는 700여만 원의 재판비용까지 청구했다. 목사 정직 2년과 재판비용까지 물어내라는 청구서를 받은 목사의 ‘죄목’은 인천 퀴어축제에서 축복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한 신학대학에서는 2018년 5월 17일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에 무지개색 옷을 입고 채플에 참여한 학생들이 후에 대학에서 징계 처분을 받았다. 신학대학에서 은퇴한 H교수는 동성애에 관한 책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속한 교단에서 재판에 회부되고, 2020년 8월 19일 결국 면직·출교 당했다. 그런데 목사 정직, 출교, 파면 등을 쉽게 재판하는 이러한 기독교가, 더욱 심각한 문제들에 대하여는 지극히 관대하다. 성폭행 문제로 ‘PD 수첩’의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던 C 목사, 아들에게 교회 세습을 하여 교회의 사기업화를 노골화하는 대형교회 목사들, 또는 금전 문제와 문서위조 등으로 법정에서 실형을 받은 세계적인 대형교회로 이름난 S교회와 K교회의 목사에게 정직이나 출교라는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타종교를 모두 악마시하는 파괴적인 기독교 우월주의, 그리고 여성은 신부로, 감독으로, 담임목사로, 또는 총회장으로 일할 수 없다고 굳건히 믿는 남성우월주의가 한국 기독교의 토대가 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성소수자는 교회·가정·사회를 파괴하는 ‘죄인’들이라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가로막고 , 성소수자들과 연대하는 교수, 학생, 목회자를 신과 성서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혐오의 정치가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에서 무조건적 사랑, 환대, 연민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예수의 흔적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라는 이름은 사업에 유리한 브랜드로 차용되며, 혐오와 배제, 자본과 권력에의 욕망만이 교회들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다층적인 ‘혐오 종교’의 대명사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오직 소수의 교회와 목회자만이 묵묵히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할 뿐, 다수의 교회는 혐오의 정치, 배타와 정죄의 정치, 물질적 축복주의, 성공지상주의를 ‘예수 믿고 구원’이라고 포장하여 ‘판매’한다. 타인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면서도 예수 이름으로 권력에의 욕망을 채우고자 대중을 선동하는 무수한 ‘전광훈’들은, 한국사회 도처에서 예수를 상품화하며 이기적으로 명예, 물질, 권력을 확장하고 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탄식한 철학자는, 예수는 인간에게 사랑과 환대와 연민을 가지고 살라고 가르쳤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 예수를 제도화한 기독교는 교황, 추기경, 감독, 신부, 목사 등 갖가지 조직과 수직적 권력구조를 만들어 거대한 권력집단으로 자리잡았다. ‘구원’을 내세워서 사람들에게 제도로서의 교회에 충실하고, 높은 자리에 앉아 화려한 의상으로 온갖 권위를 부여받은 전문종교인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마치 구원의 유일한 길인 것 처럼 왜곡시켰다. 거창하고 화려한 교회들, 엄청난 재정으로 세계 최대의 교회, 세계 최대의 감리교, 세계 최대의 장로교 등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한국의 기독교에서,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교인들의 사유세계를 지배하는 독재자 역할을 했던 중세 기독교가 면죄부를 팔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를 종교재판에 넘겼던 것처럼, 21세기 한국의 기독교는 ‘예수’와 ‘구원’을 면죄부처럼 팔면서 다층적 혐오정치를 기독교와 일치시키고 있다. 예수는 사회의 가장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 사랑, 환대를 가르치고 실천하면서, 평생 노숙인의 삶을 살았다. 그 예수정신 속에 종교의 차이, 성적 지향의 차이, 성별의 차이, 또는 피부색이나 국적의 차이 등을 근거로 한 파괴적 혐오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근원적인 자성적 비판과 단호한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한국의 기독교는 ‘예수’라는 상표는 사용하지만, 그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예수 주식회사’로 몰락할 뿐이다.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출처: 중앙일보] [중앙시평] 기독교, 예수의 흔적은 어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