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감사원장 최재형. 다시보기》
아랫글에서 인간미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친구를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원전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지나치다. 그리고 사석이지만 "하느님이 원전폐기는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감사원장으로는 미달이다. 목사하는 게 맞다. 중원
Humanity is fully understood in the bottom line. His devotion to his friend is noble. But his view of the nuclear power plant is too much. And, in private, "God has said there is a problem with nuclear waste," is not enough for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chief. It is right to be a minister.
<월간조선>
최재형 원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 키워드 중 하나는 그의 종교다. 최 원장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최재형 원장 지인 중 상당수가 최 원장을 평가할 때, 종교와 연결 지어 설명하곤 했다. 그만큼 종교, 즉 기독교 정신은 최재형 원장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요소로 작용했다.
그가 교회를 다니게 된 배경엔 부모가 있었다. 최영섭 대령과 아내 고(故) 정옥경씨는 동교동 인근 신촌교회에 출석했다. 최재형 원장도 자연스럽게 신촌교회를 다녔다. 신촌교회 장로인 최 원장은 감사원장에 임명된 후, 휴무(休務) 장로가 됐다. 아내 이소연씨도 신촌교회 권사다.
최재형 원장은 신촌교회에서 ‘평생지기’ 강명훈(姜明) 변호사를 만난다. 최 원장이 학창 시절, 소아마비 친구를 2년간 업고 등교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이 일화 속 ‘친구’가 바로 강명훈 변호사다. 그들의 피보다도 진한 우정은 1981년, 두 사람이 나란히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큰 화제를 낳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해 《조선일보》 6월18일자에 ‘신앙(信仰)으로 승화한 우정(友情) 10년’이란 제하의 기사로도 실렸다. 최재형-강명훈의 끈끈한 우정과 최재형 원장의 인격(人格)을 잘 보여주는 기사라 조금 길지만 요약·인용해보도록 한다.
〈친구끼리인 두 사람이 나란히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그리 대수로울 것이 못 된다. 그 두 사람이 유달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그것이 떠들썩한 얘깃거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소아마비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강명훈 군(25·서울대 법대 80년 졸업)과 강 군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업어서 등·하교시키며 같이 공부해온 최재형 군(25·서울대 법대 79년 졸업)이 17일 나란히 사법시험(2차)에 합격하기까지에는, 우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벅찬 인간애의 고뇌들이 있다.
명훈과 재형이 처음 만난 것은 명훈이 보인중 3년에, 재형이 경기고 1년에 재학 중이던 72년 봄이었다. 둘 다 교회에 다니던 이들은 신촌장로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다…. 학년은 하나 위였으나 나이는 명훈과 동갑이었던 재형은 지체(肢體)가 부자유스러우면서도 구김살 없는 명훈이가 신기하게까지 느껴졌고, 사지(四肢)가 자유스러우면서 때로 좌절하기 잘하는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명훈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됐다. 재형은 몰래 기도했다. 이왕이면 명훈이가 자기가 다니는 경기고에 입학해서 같이 도와가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명훈이가 창천동에, 재형이가 동교동에 살았기 때문에 같이 다닐 수 있게 된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기도의 덕분이었는지 명훈이는 경기고에 추첨이 됐다. 중학교 때까지는 어머니가 업어서 등·하교를 시켰지만 이제는 일어설 수도 없는 몸으로 만원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하는 명훈에게 재형은 스스로 ‘지팡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명훈이는 내려달라고 했지만 재형은 내려놓을 수 없었다”
아래 이어지는 내용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보통 20대 중반의 청년이라면, 젊음을 무기로 세속적인 즐거움에 심취하는 게 보통이다. 이들은 달랐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느껴지는 두 사람만의 ‘특별한’ 우정을 읽어보자.
〈명훈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하굣길에 신촌 부근에서 내린 둘은 평소와 다름없이 명훈이는 양손에 책가방을 들고 재형이는 명훈이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집까지 중간쯤 왔을 때 등 뒤에 업힌 명훈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공중변소나 화장실이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명훈이는 등에서 내려달라고 했지만 재형이는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명훈이는 등에 업힌 채로 실례를 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재형이는 명훈이가 우는 걸 보았다. 그 눈물은 다 큰 녀석이 길거리에서 실례했다는 부끄러움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감추고 스스로 극복하려 했던 신체의 결함이 사소한 곳에서 아픔으로 되살아난 그런 눈물이었다.
그날 밤 둘은 명훈이의 집에서 같이 밤을 새워가며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서로 믿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재형이는 75년에, 명훈이는 76년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명훈이는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눈이 오는 날이면 강의실까지 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아침 일찍 찾아와 주는 재형이를 볼 때마다 명훈이는 ‘사랑’을 보는 것 같은 뭉클한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명훈이는 성경(聖經)의 ‘로마서’에 나오는 구절을 외었다. “내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만인에게 모두 빚진 자이니라.” (하략)〉
최재형 원장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둘이 같은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은 앞으로도 서로 도우라는 하느님의 계시인 것 같아요. 앞으로 저나 명훈이나 많은 문제에 부딪히겠지만 훌륭히 극복할 것으로 압니다”라고 말했다. 최 원장은 또 “명훈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눈을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이 있을 뿐 아니라 지체가 자유스러운 사람보다 훨씬 넓은,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있으니까요”라고 친구 강명훈에 대한 깊은 마음을 표현했다.
강명훈 변호사는 기자에게 “고등학교뿐 아니라 사법연수원 2년간도 함께 통학했었다”며 “잠시의 선행(善行)이 아닌, (진심으로) 장기간 친구를 도왔던 이가 최재형”이라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몸이 아픈 친구를 도왔던 일이나 아이 둘을 ‘가슴으로 낳은’ 일 모두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의 힘 덕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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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최우석 조성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