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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0.09.27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경향신문]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

1882년 5월22일 제물포 바닷가의 임시장막에서 조선과 미국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조약에 서명한 이들은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1810~1888)과 미국전권대표인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1822~1895)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해괴한 국가간 수교협정이었습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수호통상조약문. 제1조는 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 남아있다|


■조미수호통상 조약 1조

도장은 신헌에 찍었지만 조약의 교섭권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체결된 조미수호통상 조약의 제1조 또한 흥미를 자아냈습니다. 이 조약 1조는 ‘거중조정’ 조항이라 합니다. 맨 첫머리에 소개한 조약 1조는 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돕는 중재자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바로 이 ‘거중조정’ 조항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미국을 향해 한없는 기대감을 표출했습니다.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않는 대인배의 나라이자 대양인인 미국’이야말로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강대국들의 야욕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름다울 미(美)’자에 ‘나라 국(國)’자 였답니다. 고종과 조선 조정은 왜 그렇게 미국을 짝사랑했던 것일까요.

1882년 제물포의 임시장막에서 거행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 광경을 그린 삽화.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1810~1888)과 미국전권대표인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1822~1895)가 도장을 찍었다.


■<조선책략>이 던진 파문

혹시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아십니까. 1880년(고종 17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예조참의 김홍집(1842~1896)이 주일청국공사 참찬관인 황준헌(1848~1905) 등과 접촉했습니다. 이때 황준헌은 앞으로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해 취할 방안을 정리해서 김홍집에게 전했는데, 이것이 6000자에 달하는 <조선책략>이라는 책입니다.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 때문에 조선이 누란의 위기에 빠졌다”면서 “러시아에 맞서려면 조선은 청국, 일본 미국과 긴밀히 연결해서 자강정책을 확립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이것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일본과 결합·합종책), 연미국(聯美國·미국과 연대)’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친중국’이야 기존 정책이니 그렇다치고 ‘결일본’은 무슨 소리였을까요.

황준헌은 중국 전국시대 때 한·위·조·연·초·제 등 6국의 합종으로 막강한 진나라를 막아섰다는 점 등을 들어 조선과 일본이 결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황준헌은 특히 “일본은 국내문제로 조선을 해코지할 겨를이 없으며, 오히려 조선이 자강해서 일본의 서쪽 울타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일본의 침략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연미국’, 즉 왜 미국과 연대하라는 것이었을까요.

재미있습니다. 영국의 속국이던 미국은 조지 워싱턴(재임 1789~1797)의 독립 이후 예의로 나라를 세워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토지와 백성을 탐하지 않고 굳이 다른 나라의 정사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황준헌은 “따라서 조선이 이런 공평한 미국을 우방으로 삼으면 화를 면하게 된다”면서 “미국은 대인배의 나라이자 대양인의 나라”고 치켜세웠습니다.

1883년 조미수교 1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1860~1914) 등 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리고 있다. 이 진귀한 모습을 신비롭게 여긴 미국 뉴욕의 언론이 삽화로 그렸다. 아서 대통령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이 구세주다

이런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소개되자 조정이 열광했습니다.

당장 미국과 수교하자는 공론이 일었고, 고종은 “<조선책략> 검토회를 열어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까지 내렸습니다. 물론 영남유생 이만손(1811~1891)의 만인소에서 보듯 보수 유생들을 중심으로 거센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청나라의 주도로 조미 통상수호조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제2대 주미공사를 지낸 이하영(1858~1919)의 언급은 당대 조선인들의 미국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침입을…걱정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미국은 황금의 부국이니 조선은 물질적으로 덕을 볼 것이다. 또 종교지상주의 국가이니 도덕을 존중할 터라 모욕과 야심도 적을 것이다.”

여기에 서구 열강 중 가장 먼저 조약을 맺고 조약의 제1조를 ‘어려울 때 도와준다’는 거중조정조항을 삽입했으니 미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1841~1905)이 조선에 파견된 미육군 교관에게 보낸 친필편지. “온마음을 다해 가르치셔서 조선 장정들을 정예병으로 키워달라”는 당부편지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조약체결 1주년을 맞이한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보빙사 일행이 체스터 아서 미국대통령(재임 1881~1884)에게 큰절을 올리는 모습이 화제의 사진으로 남아있답니다. 이때의 보빙사 일행은 귀국한 뒤 고종에게 “영어교육이 절대 필요하다”고 건의했습니다. 이에따라 1886년(고종 23년) 인재양성을 위한 영어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합니다. 미국이 파견한 원어민 교사도 최초로 고용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고종은 근대식 군사교육을 위해 미국에서 군사교관을 초빙하고 최초의 사관학교라 할 수 있는 ‘연무공원’도 설치 운영합니다. 최초의 근대적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이 공립외국어 전문교육이라면, ‘연무공원’은 장래 지휘관의 실전대비훈련을 위해 설립한 조선식 사관학교였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도와줄 것 같았던’ 대인배의 나라 미국을 향한 고종의 애정공세는 끝도 한도 없었습니다.

앨리스가 포함된 미국의 아시아사절단 단장격인 미국 국방장관 월리엄 태프트(오른쪽)가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왼쪽)와 밀약을 맺었다. 태프트는 이 밀약을 맺고 중도 귀국했고, 앨리스 일행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 고종의 초청으로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루즈벨트의 딸을 극진히 대접했지만

그러나 말입니다. 헛된 환상이었습니다. ‘대인배의 나라’라는 미국은 조선을 위해 단 한번도 나서주지 않았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미국은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05) 도움을 주기는커녕 일본을 지지함으로써 조선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국제외교의 냉엄한 현실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고종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미국에 매달립니다. 1905년 9월 대한제국에 ‘아주 특별한 손님’이 국빈 자격으로 방문합니다. 바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재임 1901~1909)의 장녀인 앨리스 루즈벨트였습니다. 앨리스는 당시 미국의 아시아 사절단의 일원으로 필리핀과 일본·중국을 방문하던 도중에 고종의 초청을 받고 몇몇 일행과 함께 3박4일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한 건데요.

고종은 21살의 앨리스를 ‘미국 공주’로 여겨 국빈으로 대접했습니다. 거리거리마다 성조기를 매달고 황실가마에 태워 영접했답니다. 9월20일 고종은 ‘앨리스 공주’를 위해 덕수궁 중명전에서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극진한 점심을 대접합니다. 조선(대한제국) 역사상 임금(황제)이 여성, 그것도 다른 나라 여성과 처음으로 점심을 같이 먹은 겁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가족 사진. 장녀인 앨리스(맨 뒤 가운데 붉은 원안)가 1905년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의 나이는 21살이었다.

■까맣게 몰랐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하지만 1905년 그 절체절명의 시기에 미국 대통령 딸까지 초청한 고종의 외교전은 너무도 순진했습니다.

고종은 그해 7월29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밀약의 골자가 기막힙니다.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으니까요. 더욱 기가 찬 것은 이 밀약을 앨리스가 포함된 미국의 아시아사절단 단장격인 미국 국방장관 월리엄 태프트(1857~1930·차기 미국 대통령·재임 1909~1913)와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1848~1913)가 맺었다는 겁니다. 태프트는 이 밀약을 맺고 중도 귀국했고, 앨리스 일행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가 고종의 초청을 받고 조선으로 이른바 ‘놀러 온 것’이었습니다.

고종은 서울을 극빈 방문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를 위해 극진한 오찬을 대접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고종황제를 ‘디스’한 앨리스

그 밀약 체결소식을 까맣게 몰랐던 고종으로서는 버스 지나간 후 손을 흔든 격이 된거죠. 약혼자와 함께 여행 중인 ‘앨리스 공주’는 결과적으로 대한제국 황제를 농락한 셈이 됐습니다.

그뿐인가요. 앨리스는 1934년 출간한 자서전(<혼잡의 시간들>)에서 오찬장에서 만난 고종 황제를 한껏 ‘디스’합니다. “…키 작은 황제(고종)는 자신의 팔은 내주지 않은채 내 팔을 잡았고…서둘러 비틀거리며 매우 좁은 계단을 내려가 평범하고 냄새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느니, “황족의 존재감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며 다소 측은하게 별다른 반응없이 멍하게 지냈다”느니 하며 깎아 내린겁니다.

점입가경은 평소에도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던 앨리스가 서울에서도 승마복 차림에 시거를 피워가며 고종을 알현했고, 명성황후 능에 가서는 능을 지키는 수호상 위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는 등 무례를 저질렀다는 겁니다. 21살 어린 나이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남의 나라와 남의 나라 지도자를 향한 존중이 ‘1’도 없었다는 거죠.

대한제국을 방문한 앨리스는 시거를 피우며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명성황후의 능 앞에 설치된 수호상 위에 앉는 등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문제는 앨리스의 방문 후 두 달도 안되어서 을사늑약(11월17일)으로 외교권이 박탈됐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미국은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교 단절 국가가 됐다는거죠. 당시 특사 자격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밝힌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을 방문한 호머 헐버트(1863~1949)라는 분 있죠. 그 분이 미국에 갔을 때는 상황 끝이어서 미국정부로부터 홀대만 받았습니다. 헐버트는 이렇게 분통을 터뜨립니다.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삿말도 없이…”라고요. 조미통상수호조약의 1조, 즉 ‘거중조정’ 조항을 철석같이 믿은 고종의 애정공세는 슬픈 짝사랑으로 끝나기도 했구요.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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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에 학살지로 연행되어가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 ⓒ 진실위 자료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충청남도 공주시 교동에 위치한 공주형무소에는 재소자 10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형무소 수용인원은 1948년 여순사건 이후 급증했다. 보도연맹원과 여순사건 관련자들 수백여 명이 수감되어 포화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형무소는 재소자를 다 감방에 수용할 수 없어서 공장들을 감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재소자들은 이불이 없어서 가마니를 깔고 덮으며 생활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용되었다. 또 재소자들은 열악한 수용시설과 식량 및 의약품의 심각한 부족으로 아사나 병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재소자들은 형무소에 수감되기 전 경찰서에서 가혹한 고문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 건강이 악화되었다. 열악한 형무소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또한 위생상태가 엉망인 형무소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재소자가 사망했고, 형무관조차 전염병으로 고생했다.
 
관제기관인 보도연맹원 모집은 원래는 주로 좌익경험이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승만 정권의 할당제가 있어서 면장이나 통장들이 농민들에게 쌀이나 비료를 주면서 가입을 유도했다. 그래서 순전히 식량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농민들도 많았다. 또한 면장 등에게 다른 일로 도장을 빌려줬다가 자기도 모르게 가입된 이들도 있었다.
 
한편 한국전쟁 발발 후 공주CIC(방첩대)는 공주형무소에 상주하면서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다. 당시 공주형무소 형무관 김아무개는 "CIC는 군복을 입었는데 계급도 없었다. 이들이 날 뛰는데, 형무소 소장도 꼼짝 못했다"라며 지난 2009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군경에게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학살명령을 내렸다. 당시 공주경찰서 경찰 신아무개는 "좌익과 보도연맹의 처리는 위에서 내려왔다.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 못한다"라고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 학살지로 연행되어 가는 재소자들 ⓒ 진실위 자료

 
그래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 형무소 재소자들은 50여 명씩 2~3대의 트럭에 실렸다. 이들은 트럭에 실리자마자 학살 현장으로 가는 동안 머리를 숙여 양 무릎 사이에 넣은 상태로 앉아 있어야 했다. 머리를 들면 트럭 네 귀퉁이에 지키고 서 있는 이송 담당자들에게 총 개머리판으로 맞아 머리가 깨져서 큰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머리판에 맞아 머리가 계란처럼 으깨졌다
 
당시 유엔한국위원단의 일원으로 유엔과 한국군의 연락장교로 복무하던 2명의 호주군 장교 피치 소령과 랜킨 중령은 이송 중 학살을 목격했다. 진실위는 조사결과 피치 소령이 당시를 이렇게 증언한 기록을 발견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2~3명이 즉사하는 것을 봤다. 그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머리가 계란처럼 으깨졌다."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은 학살지인 왕촌 살구쟁이까지 이송되었다. 그리고 공주형무소 재소자들은 미리 구덩이가 파진 학살 장소에서 오전 10시경부터 해질녘까지 공주CIC의 지휘 하에 공주파견헌병대, 공주경찰서에 의해 총살되었다.

당시 마을주민 이아무개는 "오전 10시경 따발총 소리를 시작으로, 1시간 간격으로 트럭 소리와 총소리가 해질녘까지 들렸다"고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회상했다. 또 당시 공주경찰서 경찰 한아무개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을 앉혀놓고 뒤에서 총을 쏴서 죽였다. 특히, 왕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공주CIC분견대와 공주파견헌병대에 의해 동원된 청년방위대는 구덩이들을 미리 파놓았다가 이후 시신들을 매장했다. 그러나 수많은 시신으로 미리 파놓은 구덩이가 모자랐다. 그러자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에게 스스로 자기가 죽을 자리인 구덩이를 파게하고 그들이 파놓은 구덩이 앞에서 학살했다.
 
그럼 그날 그렇게 스스로 무덤을 파고 학살당한 400여 명의 희생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그들은 어떻게 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할" 자국의 군경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날 이승만 정권에게 학살당한 대한민국 국민인 희생자들의 일부 면모를 살펴보자.
  

▲ 진실위가 발굴한 유골 ⓒ 진실위 자료

 
언쟁했던 경찰이 좌익집안이라고 모함
 
김주현은 해방 후 군 복무 중 신원조회에 걸려 체포되었다. 그는 군복무 중 고향 안동에 휴가 나왔다가, 안동경찰서 경찰과 언쟁이 있었다. 그 후 군에서 신원조회를 할 때, 김주현과 언쟁을 했던 경찰이 김주현의 집안을 좌익집안이라고 모함했고 이로 인해 김주현은 체포되었다. 김주현은 1949년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집에 편지를 보냈고, 그의 모친이 면회를 다녀왔다. 그 후 김주현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주 왕촌에서 학살됐다.
 
윤상순은 1949년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집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윤상순은 당시 정산국민학교 교원으로 좌익인사에게 학교에서 사용하던 등사기를 빌려주었는데, 이 등사기가 삐라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 후 윤상순은 1949년 3월 4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원에서 포고령 제2호 등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받고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그는 위 학살지에서 총살되었다.
 
정두환은 1948년 5월 21일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한 후 출소한 후 정부권고로 보도연맹원에 가입했다. 정두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주시 유구면 집에서 연행되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공주시내에 살던 정두환의 사촌이 1950년 7월 5일 그를 면회했다. 그리고 그는 곧 공주 왕촌에서 학살되었다.
 
김윤선은 여순사건 후 여수종산국민학교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당시 김윤선의 식구들은 여순시내의 화재로 인해 종산국민학교에 피신 중이었다. 김윤선은 누군가에 지목되어 연행되어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 후 김윤선은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김윤선의 처는 그를 면회했다. 하지만 김윤선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 위의 장소에서 학살당했다.
  

▲ 부식된 유골 ⓒ 진실위 자료

 
최정태는 여순사건 당시인 1948년 11월 진압군에 의해 마을회관에 소집되었다가 마을청년들과 함께 연행되어, 여수 중앙국민학교에 구금되었다. 최정태의 동생은 당시 14연대 군인으로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겁이 나 고향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최정태와 그의 부친이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 마을 구장의 집 방화사건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최정태는 여수중앙국민학교에서 조사를 받고 형을 선고받았다. 최정태는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부친이 자주 면회를 다녔다. 최정태의 부친은 마을주민의 서명을 받은 탄원서까지 제출했다. 하지만 최정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손용암은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 마을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여수종산국민학교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손용암의 먼 친척이 좌익 활동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손용암의 이름을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손용암은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손용암의 모친이 면회를 갔었다. 손용암은 한국전쟁 직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그의 모친은 손용암의 머리카락과 부러진 이를 나중에 유물로 받았다고 한다.
 
정선영은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도망 다니다가 경찰서에 자수했다. 그 후 정선영은 대전형무소를 거쳐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정선영의 처 등 가족들이 면회를 왔다. 그리고 정선영은 한국전쟁 발발한 직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당시 가족들은 정선영이 곧 출소할 때가 다 되었다며 새옷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박인원은 여순사건 후 거주지인 여천군 삼산면에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박인원은 여순사건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에게 배를 빌려줘서 연행되었다. 연행 당시 박인원은 집에 숨어 있다가 자수하면 용서해준다고 해서 자수했던 것이다. 박인원은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그의 모친이 면회를 갔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마을의 중학생들은 다 연행
 

김태근은 여순사건 이후 고흥군 두원면 집에서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김태근은 당시 고흥읍의 명륜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마을의 중학생들은 다 연행되었다. 김태근은 경찰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공산주의자들을 도와줬다는 허위진술을 했다. 그 후 그는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김태근은 공주형무소에서 엽서를 보냈고 이에 그의 부친이 면회를 다녀왔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김귀삼은 여순사건 이후 경찰이 반란군 동조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경찰서에 죄가 없다면서 자수했다. 그 후 김귀삼은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처가 딸을 데리고 면회를 갔었다. 김귀삼은 한국전쟁 발발 후 위의 장소에서 총살당했다.
 
이렇게 학살된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의 일부 유족들은 학살 후 시신이나마 수습하기 위해 학살지인 왕촌 살구쟁이에 왔었다. 그러나 유족들은 학살현장의 시신들이 줄줄이 묶인 채 너무 많이 부패되어 있어서 결국은 시신수습을 할 수 없었다.
 
진실위는 지난 2009년 6월 12일부터 7월 20일까지 충남 공주시 상왕동 29-19번지 (왕촌 살구쟁이)에서 유해발굴을 실시한 결과, 모두 3개의 구덩이에서 약 31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 발굴에서는 민간인을 사살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M1 탄피 527개와 카빈 탄피 107개, M1 탄두 82개, 카빈 탄두 4개 등을 발굴했다. 하지만 진실위는 시간 및 예산상의 이유로 나머지 3개의 구덩이는 발굴하지 못 했다. 따라서 발굴하지 못한 나머지 구덩이 3개까지 고려하면 700여 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진실위는 추정했다.
 
한편 발굴 당시 유해 대부분은 구덩이 양쪽 벽을 향해 두 줄로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손이 뒤로 묶여 있거나 일부는 목뒤로 깍지를 낀 자세로 발굴되었다. 이는 희생자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사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진실위는 유골의 감식결과 학살 희생자는 모두 남성이었으며 나이는 대부분 20대 이상으로 판단했다.
  

▲ 진실위가 세운 학살지 안내판 ⓒ 진실위 자료

 
오전 10시부터 해질녘까지 1시간 간격 총살 집행
 
왕촌 살구쟁이 너머의 중동골 주민 이아무개는 당시 "오전 10시부터 해질녘까지 1시간 간격으로 총살이 집행되었고, 700명이 희생되었다는 말이 돌았다"고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1950년 7월 외신에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이 2대에 트럭에 실려 왕촌 살구쟁이로 이송되는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에서 재소자들은 한 트럭에 50여 명씩 실려 있었다. 그러므로 진실위는 한 번에 100여 명의 재소자가 이송되었다고 추정했다. 당시 중동골 주민 이아무개의 증언대로 오전 10시부터 해질녘인 오후 7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총살이 진행되었다면, 학살 희생자 규모는 700명 이상도 가능 하다고 진실위는 판단했다.
 
당시 공주경찰서 경찰들은 헌병대와 함께 왕촌에서 공주형무소 재소자를 총살하는 데 동원되었다. 공주형무소 형무관 김아무개도 "특별경비대는 이송만 했지, 총살은 CIC가 했다"라며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위와 같은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2010년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공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9일경 최소 400명 이상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공주CIC분견대, 공주파견헌병대, 공주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공주 왕촌 살구쟁이에서 집단살해되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살해한 것으로서 이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국가가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처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참고로 당시 공주형무소 형무관들은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한국전쟁 발발 당시 공주형무소에는 사형수가 한 명도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아, 국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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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조시현 연구위원


이 글은 2019년 9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 ­‘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1. <반일 종족주의>에는 역사도 없고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다

이영훈 등이 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주류적 역사해석에 대한 도발, 상식의 해체, 단언적 서술 등을 통해 명쾌하고 매력적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그들이 약속한 실증이 아니라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과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겉으로는 전문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학술적 뒷받침이 없는 ‘가짜’ 학문에 불과하다. 결국 대중을 겨냥한 또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선동에 그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강제동원과 전시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의 부정에 할애되어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모두 거짓말로 등치시키고 예외에 속할 일부 사례를 들어 전체의 것으로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범하고 있다. 또한 구술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물론 피해자의 관점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 이 책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용인하는 반역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의 주장은 “선진국”이라는 가치를 설정한 것 말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는 반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이는 침략전쟁의 죄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정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책임의 부정은 법과 정의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여온 문명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강제동원에 관한 진실을 두고 “조총련계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낳은 “빨갱이” 망령과 냉전적 사고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절멸의 대상인 적으로 설정하면서 역사전쟁을 운운하고 있다.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Specters of Marx(마르크스의 유령들), xviii).

2. <반일 종족주의>는 식민지 범죄에 대한 은폐이자 역사범죄이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무리한 주장의 기반이 어딘지도 주목된다. 이들의 주장은 특히 2012년에 나온 강제동원에 관한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고 했던 사법적폐 세력의 주장과 판박이다.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2018년 10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일본의 가해기업인 신일본제철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으로서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일본정부는 즉각 이 판결에 반발하였고 한일 간의 갈등이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반일 종족주의>란 책이 나왔고 대법원의 판단과는 동떨어진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대법원 판결이 청구권협정에 위배된 것이라며 판결을 무력화하려는 일본정부의 주장과 닮아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저자들이야말로 “친일 종족주의자”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기득권을 지켜보고자 하는 세력의 매니페스토(manifesto)임과 동시에 피해자들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슬픈 인생에서 나온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 발언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반일 종족주의>란 책을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역사부정 문제에 대하여 전 세계적인 대응노력이 주목된다. 유대인에게 자행된 홀로코스트나 나치범죄는 물론이고 아르메니아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나 반인도적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형사입법과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 식민지배 시기 동안 있었던 학살, 수탈 등 식민지범죄에 대한 관심과 탈식민주의 요구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오히려 커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각종 과거사정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한계도 많이 보이고 있다.
대일 과거사문제 역시 단박에 청산되거나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제법상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가 적용되어 단죄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중대한 범죄자가 처벌되지 않는 이른바 불처벌(impunity) 문제에 대한 고민과 불처벌의 현실 속에서 확산되는 역사부정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도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3. <반일 종족주의>에는 민족이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의 이른바 주류적 역사서술과 피해자운동을 “반일 종족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가 무슨 말인지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이 말은 물질주의와 거짓말을 토템으로 하는 샤머니즘에 사로잡힌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20-21쪽). 이 샤머니즘의 집단이 바로 종족이며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고 한다.
‘종족’(tribe 또는 ethnic group)이란 말을 현재와 “지난 60년간의 정신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하나의 분석개념으로서 갖추어야할 기초적인 엄밀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름붙이기를 통하여 분석 단위로서 ‘민족’이란 개념을 비하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이러한 호명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 역시 민족이란 집단 현상을 도외시한 원자론적 서사와 감상의 나열이 그치고 있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종족주의의 차이를 말하지도 못하는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은 일제 강점이전의 조선이 갖는 국가성과 근대지향을 부정하려는 기획을 드러낸다.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가지는 ‘네이션(nation)’으로서 조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현대 한국의 네이션을 종족으로 대체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통해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류적 역사인식을 뒤틀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도 서구에서 만들어진 보편적인 범주로서 네이션은 현실로서 있었고 이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며 부단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실증의 근거로 제시하는 문서나 수치들은 바로 식민지배의 정당화라는 틀 속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사료비판도 없다. 결국 이들은 문서작성자의 세계관에 동조한 나머지 일제의 식민지배는 나쁘지는 않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곧 일제의 통치를 미화하려했던 식민사관의 후예라고 할 만하다.

4. <반일 종족주의>에는 일제의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없다

이 책은 또한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비판이 없이 마치 강제동원과 ‘위안부’의 역사를 신화인양 부정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이라는 책에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를 비판하며 인종주의와 결부된 “종족적 민족주의”를 말한 바 있다. 이들이 한국사회를 비판하며 제시한 종족주의라는 말은 오히려 제국주의 일본의 민족주의 비판에 걸맞다. 반일 종족주의를 말하기에 앞서 일제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제에 의한 “주권강탈”(42쪽)을 말하긴 한다. 그러나 식민지 통치시스템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하여 일본의 일부, 즉 자기나라로 만들었지만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모순은 해명되지 않는다. 일제의 통치가 잘된 일이었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에 바쁘다. 명색은 한일병합이라고 떠들었지만 현실은 식민지배를 상징하는 총독에 의한 통치였다는 점, 조선총독은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
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칫하기까지 하
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 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
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


 

천황 이외에 어떠한 법적 통제를 받지 않았고 군대에 의해서만 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 식민지 조선에 실시한 법이라는 것은 천황제 아래 삼권을 가진 총독의 의사에 좌우되는 전제적인 것이었고, 그 마저도 일본 내지의 법과 별개의 이원적 체계로서 관료체제를 통제하지도 못했으며 오로지 식민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주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종주국의 이익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법이었다는 점, 일제의 식민지배에 법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하기보다는 법은 통치술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점, 이러한 법 현실은 언제나 정의의 공백을 낳았고 오늘날까지 정의를 갈구하는 피해자들의 외침으로 현재화되고 있다는 점, 병합은 결국 영토의 통합 즉 일제의 영토 확장이었지 국민간의 통합이나 EU식 지역통합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조직적인 민족차별을 낳고 끝내 죽음의 강제동원으로 주민들을 내몰았다는 점, 병합과 식민통치 방식 사이의 모순은 결국 민족자결의 요구로 분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해방’이라는 것은 민족과는 무관한 일이 되고 ‘독립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국권회복을 말할 여지가 없이 1948년에 건국했다는 스토리와 연결된다. 이는 바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보여주고 지금도 일본의 우익이 견지하고 있는 역사관, 즉 일제의 패전으로 한국이 분리독립하게 되었다는 역사서술의 한국판이다.

5. 청구권문제와 강제동원문제는 끝난 게 아니다

한일 청구권문제와 관련하여 주익종은 특히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와 “한일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를 “팩트”라고 주장한다(115쪽). 그가 얘기하는 팩트라는 것이 사실 또는 진실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 주장들은 다 사실이 아니다. 먼저 “별로” 없었는지 있었는지는 어떤 판단 기준이 없이는 말할 수 없는 명제이다. 별로였는지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사실 여부 또는 진위문제가 아닌 판단과 의견의 문제이다. 진실은 청구할 것이 여러 가지 있었다는 것, 별로 없었는지 여부에 대해 정확한 산정을 거친 끝에 3억불 해당의 무상공여가 된 것도 아니라는 점, 그 가운데 ‘위안부’문제는 한일회담에서 거론조차 안 되었고 따라서 “별로”인지 알 수도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완전히” 끝난 것인지 여부 문제는 협정의 해석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 규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끝났다’는 것도 팩트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완전히 끝났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한일 정부가 입장 대립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이 어떻게 풀려갈지 지켜봐야 아는 문제이다. 현재진행형의 얘기를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지 잘 따져볼 문제다.
현재 판결을 받긴 하였지만 위자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관련한 이들의 입장도 주목된다. 청구권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또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이 언급하고 있는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에서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보상금”이 언급되긴 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보상금에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이 포함되는지 여부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이 두 나라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리를 계속 주장해야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들의 노력은 2018년의 대법원 판결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강제동원문제에 관한 주요한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끝났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협정 규정에 대한 해석이고 규범적 주장이지 단순한 팩트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해석에 상대방도 동의하거나 양쪽이 따라야하는 유권적인 해석이 나와야 정리될 문제인 것이다. ‘끝났다’는 논리는 피해자들에게 윽박지르며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한다는 주익종(또는 아베 식의)의 강박관념은 그로 하여금 “징용 노무자의 정신적 피해는 당초부터 청구하지 않기로 한 것”(126쪽)이라는 주장으로 이끈다.
그가 무엇으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책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의 하나 그의 주장대로 청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법적으로는 그러한 사실에서 권리의 포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권리를 포기한다면 명확하게 포기한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6. 식민배상문제도 남아있다

주익종은 또 “국제법, 국제관계에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한국이 배상 받으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126쪽)라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 식민배상은 없었다, 즉 사실에 관한 서술을 하며 현실론을 전개하고 있다. 쉽게 쓰려다 보니 배상의 선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선례가 없었다고 하여 그에 관한 “국제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이 있냐, 없냐의 문제는 사실문제 같아 보이지만 규범적 판단을 내포한 문제이기도 하다. 선례가 없었다고 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은 선례를 만들어 법을 확인하는 일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러한 맥락에서 규범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필자들이 일제하에서 재산권이 보장되었음의 근거로 드는 것이 조선민사령이다. 이는 일본의 민법을 총독의 명령에 의해 조선에 빌려 썼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현재 한국의 민법처럼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하였음이 팩트이다. 이러한 손해배상문제를 다루는 것이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을 하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상문제를 다룰 법적 여지는 식민체제하에서도 있었던 것이지만 실현될 수 없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일본의 패전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건 1965년 한일협정에서건 식민지배하에서의 배상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지금도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서는 것은 아니다.2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식민배상문제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청구권협정이 재산문제를 해결한 “최선의 합의”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일본과의 과거사가 청산되었고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127쪽). 그러나 오늘날 세계적인 조류는 오히려 식민지배와 식민지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말고도 이탈리아와 리비아, 영국과 케냐 및 인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일과 나미비아, 프랑스와 알제리, 스페인과 멕시코, 카리브해 국가들과 구 종주국들 사이에 식민 지배 아래 발생한 각종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요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성과도 나오고 있다. 특히 2019년 3월 26일에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유럽의회는 “유럽의 식민주의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자행된, 과거는 물론 지금도 계속되는 부정의와 인도에 반한 범죄의 역사를 유럽연합 기관들과 회원국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통과 시키기도 했다. 청구권협정의 진실은 협정으로 전쟁배상도 식민배상도 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있다.


2 116쪽의 표에서는 대일 강화조약 제14조의 내용을 (a) 일본인 재산몰수와 연합국의 추가배상 협상에 관한 권리와 (b) 연합국과 그 국민의 청구권 포기로 요약하고 있는데 제14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즉 제14조는 첫머리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전쟁 중에 일본에 의해 야기된 손해와 고통에 대하여 배상금(reparations)을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을 승인한다”고 하여 명확하게 일본의 전쟁배상 책임원칙을 확인하고 있다. 청구권협정에는 이와 유사한 어떤 표현도 쓰여 있지 않고 따라서 배상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없다.


 

 

식민지하의 범죄와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로 초점이된 강제동원문제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해결되어야할 것이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
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7. 맺으며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강제동원과 ‘위안부’문제와 같이 오늘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에 있어서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하여 무엇이 팩트인가로 이슈를 단순화하면서 사실과 법의 문제를 뒤섞어놓고 그릇된 의견과 행동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주 현실참여적인 책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들은 한국의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또 다른 최종심급 역할을 자임한다. 판례에 대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단정적이고 교조적인 주장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법원리가 들어가 있으므로 그러한 법이해가 올바른지 검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거사와 법 또는 정의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묻게 된다. 법의 문제는 법이 어느 사건이나 시기에 작용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배제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팩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법도 역사속에서 같이 흐르며 힘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느 행위를 합법이라거나 불법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팩트이다. 과거에 어떤 판단을 했다면 그것은 법적 의미를 가지는 팩트이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필요에 따른 법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말을 다시 빌리면 언제나 이미 현재화될 가능성을 가진 법 또는 정의라는 유령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배회하고 있다. 과거의 법을 화석처럼 현재의 법과 단절된것으로 사유하지 않는 가운데 한일회담에서 그리고 청구권협정의 문구에서 배제된 이들의 희망을 쓰는 역사 서술을 기대해본다. (<월간 순국>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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