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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이 있는 마음에 쉼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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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피를 묻히지 말자>

작년 12월 31일 (그러니까 약 20시간 전) BBC 뉴스에서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런던 남부의 한 병원 의사가 (휴 몽고메리라고 기억한다. 아닐 수도 있다) 자기 병원의 상태에 대해 말했다. 자기들이 어떤 고생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며, 자기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어떻게 다른 병원에 이송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젊은이들이 코로나19가 자기들에게는 거의 자각 증세도 없거나 가벼운 감기처럼 지나가므로 마음대로 모이고 파티하면서 방역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들이 퍼뜨린 코로나로 지금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은 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손에 피를 묻히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

코로나19가 노인과 기저질환자에게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그 정도의 사망률을 냈다면 과연 젊은이들이 그렇게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을까?

이번 코로나 사태로 서구 사회는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젊은이들을 어떤 원칙으로 교육했고, 그들에게 어떤 철학을 집어 넣어 주었기에 그들이 지금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는지를. 그들에게 욕망의 만족과 절제에 대해,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해 취할 태도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 주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노인의 생명을 존중해 주었더라면, 기저질환자의 생명을 존중해 주었더라면, 아무리 자유로운 사회라 해도 필요할 때에는 타인의 안녕을 위해 자기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코로나가 이렇게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을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코로나가 인류의 이기심과 무절제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생각한다.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비록 일부 교회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이런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고 사람들에게 모임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고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할 교회가 여전히 종교적인 구실을 붙여서 그런 정책에 역행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다. 그들의 모임에서 퍼진 코로나가 어떤 사람들에게 연쇄적으로 전달되었고, 그 전달 과정에서 어떤 노인이나 기저질환자 혹은 취약한 사람들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죽었는지를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마지막 날 그들은 종교의 이름을 빙자한 살인자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사람은 까맣게 잊을지라고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하는 교회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뭐가 다른가? 지금 같이 엄중한 시기에 모든 교회는 일체의 모임을 비대면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이게 목사가 할 소린가 싶어 한탄 밖에 나오지 않지만 이런 소리를 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지난 여름에 나의 담벼락에 끄적거린 글인데, 요즘 상황도 상황인지라, 약간 첨삭하여 다시 올린다.

<무서운 사람, 문재인>

성경에서 ‘절제’라고 번역된 헬라어 중의 하나가 ‘엔크라테이아’인데,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권력을 가지고 지배한다”는 뜻이 강하다. 헬라어 ‘엔 크라토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절제란 ‘자기에 대해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절제란 힘의 문제이다. 자기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고 자기를 지배하는 사람은 절제하는 사람이고, 자기를 지배할 힘이 없는 사람은 절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절제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고,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유약한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의 통찰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성경도 이렇게 가르친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분노를 조절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용사나 장수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문재인씨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잊을 수 없는 장면의 하나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발생한 한 사건이었다. 거기에 참석한 이명박씨를 향해서 백원우씨가 뛰쳐나오면서 ‘사죄하라’고 외치다가 경호원들에게 제압 당해 끌려 나간 해프닝이 있었다. 그 때 문재인씨가 이명박씨에게 가서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하였다. 뒤에 김정숙 여사의 전언에 의하면, 그 밤에 문재인씨가 집에서 얼마나 통곡을 하는지, 죽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인상적인 장면이어서 잊을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점점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도 깨닫게 된다. 그는 용사 보다 낫고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은 인물이다. 지금도 광화문에서 태극기 부대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면서 모욕을 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것을 모를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문제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다. 무서운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그를 이기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절제력을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마음에 떠오르는대로, 입이 하자는대로 마구 지껄여서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다. 그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정도로 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 중에는 이렇게 강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마음에 떠오르는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참을 줄 알고, 지금 당장 눈앞에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어도 그 일의 배경을 다시 헤아려보고, 지금 당장 불리할 것처럼 보이는 사건에 대해서도 다른 면에서 해석해 보는 자제력과 지혜가 좀 필요한 것 같다.

민주당에 대한 지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당장 누가 좀 마음에 안드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당적을 반납하느니 하는 성급함은 실은 연약함의 다른 얼굴이다. 나도 민주당에 아주 마음에 안드는 요소가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같은 사안에서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당의 속사정도 있을 듯하니 기다리는 중이다. 나도 보수적인 목사이지만 민주당도 보수적인 정당이 아닌가.

오랜 기득권을 혁파하는 개혁은 힘든 작업이다. 두 걸음 전진했다가 한 걸음 후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한 걸음은 전진한 것 아닌가. 긴 안목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면서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그래도 개혁이 될까 말까 한데, 작은 일로 흥분하고 다투면 개혁은 물건너 간다. 개혁파들이여, 더 강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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