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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이 있는 마음에 쉼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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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건달이 홍세화 선생에게

1995년 3월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란 책이 나왔을 때, 저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상고심이 진행 중인 때라 도서 검열이 까다로웠습니다.

하필이면 선생과 과거의 공범이었던 분이 저의 당시 공범이어서 선생의 책은 교도관들과 몇 차례 싸운 후에야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똘레랑스”

처음 보는 프랑스어가 정말 부러웠습니다.

1994년 7월 9일. 경비교도대가 총을 맨 채 내 독방 앞에 나타나 하루 종일 대면 계호를 시작했습니다.

후방 집결지가 어디일까? 대구일까? 부산일까? 아니면… 후방 집결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루 종일 죽음의 공포와 함께 지냈습니다.

“똘레랑스”와 “죽음의 공포”가 공존할 수 있을까?

민중이 “똘레랑스”를 말할 수 있는 사회가 올까?

회의는 들었지만 정말 부러운 단어였습니다.

책이 나온지 25년이 지났습니다.

선생은 태극기 부대의 광화문 집회와 “우리가 조국이다!”를 외치는 서초동 집회에서 ‘상징폭력’의 실상을 보았다며 그들의 앵똘레랑스(불관용)를 비판합니다.

26년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저는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태극기 부대의 존재에서 여전히 똘레랑스가 아닌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2017년 3월. 촛불이 군의 총칼과 탱크와 장갑차에 맞서 싸우다 쓰러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쿠데타를 모의한 조현천이 여전히 외국에서 월450만원의 연금을 받고, 경찰과 검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안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보다 더 무서운 경찰과 검찰, 법무부의 눈에 띠지 않는 훈령과 예규들이 일제 때부터 이름만 바뀐 채 여전히 건재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민주건달들이여 진보를 참칭하지 마라”

“문재인 대통령이 왜 집권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무슨 국정 철학을 갖고 있고, 무슨 정치철학을 갖고 있는지, 무슨 미래 청사진을 갖고 있는지 보이질 않잖아요.”

선생의 인터뷰기사의 제목과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저는 88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감옥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노동하지 않는 삶을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출소하고 귀농한 지 19년만인 2018년 겨울. 마을의 새마을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발암물질인 석면슬레이트 지붕만 유산으로 남겨놓은 관변단체가 좋아서 새마을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고, 마을마다 1명씩 의무적으로 뽑아 군(郡)새마을운동 지부에 보고해야 했기 에 떠밀려 맡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지도자가 된지 1년만에 군(郡)새마을운동 지부장 표창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이념이 근면, 자조, 협동이 아니라 생명, 평화, 공경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황당한 것은 행사에 참여한 다른 모든 지도자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근본이념이 바뀐 것도 몰랐고, 알았어도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농민운동(가톨릭농민회), 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 전국상임집행위원장)을 거쳐 현재는 생명운동가를 자처하는 정성헌 선생이 2018년 봄에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에 당선되면서 아예 새마을운동의 근본이념부터 바꿔버렸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조직원과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단체의 대표가 바뀌었고, 이념이 바뀌었는데 정작 단체의 주요 구성원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생명, 평화, 공경은 오직 1년에 한번 있는 행사장의 현수막에서만 펄럭이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새마을운동을 얘기한 것은 촛불혁명정부는 아직 온전히 권력을 잡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 농사를 지었으니 진보와 보수 정권의 농정(農政)을 모두 밭에서 겪어보았습니다.

DJ의 농업의 다원적 가치 계량화와 노무현 대통령의 농업경영체 등록제도는 그야말로 획기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지만 책상에 앉아 형식과 절차와 성과를 따지는 공무원들 때문에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습니다.

보수정권을 거쳐 다시 DJ와 노무현의 정책을 되살리는 것 역시 공무원들의 벽에 막혀 있습니다.

DJ의 농업의 다원적 가치 평가는 현 정부의 “공익형 직불제”로 아주 조금 진전을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부재지주와 가짜 농사꾼을 가려내 경자유전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농업경영체 등록제도는 공무원들 스스로 법을 어겨가며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시험 한번 통과했다는 것만으로 기득권층이 돼 버린 100만명의 공무원들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촛불혁명정부는 온전히 권력을 잡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공무원들의 저항은 극렬합니다.

재작년 12월. 부패한 6급 수사관 하나가 청와대를 흔들어놓더니,

작년 5월에는 박근혜 때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실 행정관으로 일했던 주미대사관 동포담당 참사관이 강효상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국가기밀을 누설해 세상을 시끄럽게 한일이 있었습니다.

올해는 법무부 외청의 기관장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맞장을 뜨자며 대들고 있습니다.

선생은 공무원들의 저항과 그를 진압하려는 싸움을 그저 “‘빠’와 ‘양념’의 정치, 공작 정치가 더해져 진짜 정치는 실종”된 것이라 편안하게 말합니다.

5년전 백남기 선생님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의사들과 경찰과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의 본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검찰은 경찰관 4명을 불구속 기소했고, 판사는 벌금 천만원과 7백만원을 선고했습니다.

백남기 선생님은 죽음으로써 민중의 적이 누구인지 알려준 것입니다.

1999년 20년 3개월 만에 고국을 방문했고, 2002년 영구 귀국해 현재 가족이 있는 프랑스를 오가며 살고 있는 선생에게는 지금의 현실이 “‘어제까지 아주 좋았는데 오늘 그런대로 괜찮은 세력’(수구세력) 대 ‘어제까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오늘 아주 좋은 세력’(보수세력) 간에 더 좋은 내일을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다투는 장”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동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저항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민중에게 지금의 현실은 민중과 그 벗들이 민중의 적과 치열하게 싸우는 순간입니다.

민중에게는 강남좌파, 민주건달 모두가 소중한 벗입니다. 그들이 민중의 적의 편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인생의 단 한순간이라도 민중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면 민중은 그들을 벗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민중의 삶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글을 민중의 적이 애송(愛誦)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서 있는 자리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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