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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13
    "머리가 계란처럼 깨져" 외국인도 놀란 이승만 학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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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상조
  3. 2021.01.13
    박영은

▲ 트럭에 학살지로 연행되어가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 ⓒ 진실위 자료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충청남도 공주시 교동에 위치한 공주형무소에는 재소자 10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형무소 수용인원은 1948년 여순사건 이후 급증했다. 보도연맹원과 여순사건 관련자들 수백여 명이 수감되어 포화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형무소는 재소자를 다 감방에 수용할 수 없어서 공장들을 감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재소자들은 이불이 없어서 가마니를 깔고 덮으며 생활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용되었다. 또 재소자들은 열악한 수용시설과 식량 및 의약품의 심각한 부족으로 아사나 병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재소자들은 형무소에 수감되기 전 경찰서에서 가혹한 고문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 건강이 악화되었다. 열악한 형무소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또한 위생상태가 엉망인 형무소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재소자가 사망했고, 형무관조차 전염병으로 고생했다.
 
관제기관인 보도연맹원 모집은 원래는 주로 좌익경험이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승만 정권의 할당제가 있어서 면장이나 통장들이 농민들에게 쌀이나 비료를 주면서 가입을 유도했다. 그래서 순전히 식량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농민들도 많았다. 또한 면장 등에게 다른 일로 도장을 빌려줬다가 자기도 모르게 가입된 이들도 있었다.
 
한편 한국전쟁 발발 후 공주CIC(방첩대)는 공주형무소에 상주하면서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다. 당시 공주형무소 형무관 김아무개는 "CIC는 군복을 입었는데 계급도 없었다. 이들이 날 뛰는데, 형무소 소장도 꼼짝 못했다"라며 지난 2009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군경에게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학살명령을 내렸다. 당시 공주경찰서 경찰 신아무개는 "좌익과 보도연맹의 처리는 위에서 내려왔다.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 못한다"라고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 학살지로 연행되어 가는 재소자들 ⓒ 진실위 자료

 
그래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 형무소 재소자들은 50여 명씩 2~3대의 트럭에 실렸다. 이들은 트럭에 실리자마자 학살 현장으로 가는 동안 머리를 숙여 양 무릎 사이에 넣은 상태로 앉아 있어야 했다. 머리를 들면 트럭 네 귀퉁이에 지키고 서 있는 이송 담당자들에게 총 개머리판으로 맞아 머리가 깨져서 큰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머리판에 맞아 머리가 계란처럼 으깨졌다
 
당시 유엔한국위원단의 일원으로 유엔과 한국군의 연락장교로 복무하던 2명의 호주군 장교 피치 소령과 랜킨 중령은 이송 중 학살을 목격했다. 진실위는 조사결과 피치 소령이 당시를 이렇게 증언한 기록을 발견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2~3명이 즉사하는 것을 봤다. 그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머리가 계란처럼 으깨졌다."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은 학살지인 왕촌 살구쟁이까지 이송되었다. 그리고 공주형무소 재소자들은 미리 구덩이가 파진 학살 장소에서 오전 10시경부터 해질녘까지 공주CIC의 지휘 하에 공주파견헌병대, 공주경찰서에 의해 총살되었다.

당시 마을주민 이아무개는 "오전 10시경 따발총 소리를 시작으로, 1시간 간격으로 트럭 소리와 총소리가 해질녘까지 들렸다"고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회상했다. 또 당시 공주경찰서 경찰 한아무개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을 앉혀놓고 뒤에서 총을 쏴서 죽였다. 특히, 왕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공주CIC분견대와 공주파견헌병대에 의해 동원된 청년방위대는 구덩이들을 미리 파놓았다가 이후 시신들을 매장했다. 그러나 수많은 시신으로 미리 파놓은 구덩이가 모자랐다. 그러자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에게 스스로 자기가 죽을 자리인 구덩이를 파게하고 그들이 파놓은 구덩이 앞에서 학살했다.
 
그럼 그날 그렇게 스스로 무덤을 파고 학살당한 400여 명의 희생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그들은 어떻게 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할" 자국의 군경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날 이승만 정권에게 학살당한 대한민국 국민인 희생자들의 일부 면모를 살펴보자.
  

▲ 진실위가 발굴한 유골 ⓒ 진실위 자료

 
언쟁했던 경찰이 좌익집안이라고 모함
 
김주현은 해방 후 군 복무 중 신원조회에 걸려 체포되었다. 그는 군복무 중 고향 안동에 휴가 나왔다가, 안동경찰서 경찰과 언쟁이 있었다. 그 후 군에서 신원조회를 할 때, 김주현과 언쟁을 했던 경찰이 김주현의 집안을 좌익집안이라고 모함했고 이로 인해 김주현은 체포되었다. 김주현은 1949년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집에 편지를 보냈고, 그의 모친이 면회를 다녀왔다. 그 후 김주현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주 왕촌에서 학살됐다.
 
윤상순은 1949년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집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윤상순은 당시 정산국민학교 교원으로 좌익인사에게 학교에서 사용하던 등사기를 빌려주었는데, 이 등사기가 삐라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 후 윤상순은 1949년 3월 4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원에서 포고령 제2호 등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받고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그는 위 학살지에서 총살되었다.
 
정두환은 1948년 5월 21일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한 후 출소한 후 정부권고로 보도연맹원에 가입했다. 정두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주시 유구면 집에서 연행되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공주시내에 살던 정두환의 사촌이 1950년 7월 5일 그를 면회했다. 그리고 그는 곧 공주 왕촌에서 학살되었다.
 
김윤선은 여순사건 후 여수종산국민학교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당시 김윤선의 식구들은 여순시내의 화재로 인해 종산국민학교에 피신 중이었다. 김윤선은 누군가에 지목되어 연행되어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 후 김윤선은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김윤선의 처는 그를 면회했다. 하지만 김윤선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 위의 장소에서 학살당했다.
  

▲ 부식된 유골 ⓒ 진실위 자료

 
최정태는 여순사건 당시인 1948년 11월 진압군에 의해 마을회관에 소집되었다가 마을청년들과 함께 연행되어, 여수 중앙국민학교에 구금되었다. 최정태의 동생은 당시 14연대 군인으로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겁이 나 고향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최정태와 그의 부친이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 마을 구장의 집 방화사건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최정태는 여수중앙국민학교에서 조사를 받고 형을 선고받았다. 최정태는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부친이 자주 면회를 다녔다. 최정태의 부친은 마을주민의 서명을 받은 탄원서까지 제출했다. 하지만 최정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손용암은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 마을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여수종산국민학교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손용암의 먼 친척이 좌익 활동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손용암의 이름을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손용암은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손용암의 모친이 면회를 갔었다. 손용암은 한국전쟁 직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그의 모친은 손용암의 머리카락과 부러진 이를 나중에 유물로 받았다고 한다.
 
정선영은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도망 다니다가 경찰서에 자수했다. 그 후 정선영은 대전형무소를 거쳐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정선영의 처 등 가족들이 면회를 왔다. 그리고 정선영은 한국전쟁 발발한 직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당시 가족들은 정선영이 곧 출소할 때가 다 되었다며 새옷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박인원은 여순사건 후 거주지인 여천군 삼산면에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박인원은 여순사건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에게 배를 빌려줘서 연행되었다. 연행 당시 박인원은 집에 숨어 있다가 자수하면 용서해준다고 해서 자수했던 것이다. 박인원은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그의 모친이 면회를 갔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마을의 중학생들은 다 연행
 

김태근은 여순사건 이후 고흥군 두원면 집에서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김태근은 당시 고흥읍의 명륜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마을의 중학생들은 다 연행되었다. 김태근은 경찰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공산주의자들을 도와줬다는 허위진술을 했다. 그 후 그는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김태근은 공주형무소에서 엽서를 보냈고 이에 그의 부친이 면회를 다녀왔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김귀삼은 여순사건 이후 경찰이 반란군 동조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경찰서에 죄가 없다면서 자수했다. 그 후 김귀삼은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처가 딸을 데리고 면회를 갔었다. 김귀삼은 한국전쟁 발발 후 위의 장소에서 총살당했다.
 
이렇게 학살된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의 일부 유족들은 학살 후 시신이나마 수습하기 위해 학살지인 왕촌 살구쟁이에 왔었다. 그러나 유족들은 학살현장의 시신들이 줄줄이 묶인 채 너무 많이 부패되어 있어서 결국은 시신수습을 할 수 없었다.
 
진실위는 지난 2009년 6월 12일부터 7월 20일까지 충남 공주시 상왕동 29-19번지 (왕촌 살구쟁이)에서 유해발굴을 실시한 결과, 모두 3개의 구덩이에서 약 31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 발굴에서는 민간인을 사살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M1 탄피 527개와 카빈 탄피 107개, M1 탄두 82개, 카빈 탄두 4개 등을 발굴했다. 하지만 진실위는 시간 및 예산상의 이유로 나머지 3개의 구덩이는 발굴하지 못 했다. 따라서 발굴하지 못한 나머지 구덩이 3개까지 고려하면 700여 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진실위는 추정했다.
 
한편 발굴 당시 유해 대부분은 구덩이 양쪽 벽을 향해 두 줄로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손이 뒤로 묶여 있거나 일부는 목뒤로 깍지를 낀 자세로 발굴되었다. 이는 희생자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사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진실위는 유골의 감식결과 학살 희생자는 모두 남성이었으며 나이는 대부분 20대 이상으로 판단했다.
  

▲ 진실위가 세운 학살지 안내판 ⓒ 진실위 자료

 
오전 10시부터 해질녘까지 1시간 간격 총살 집행
 
왕촌 살구쟁이 너머의 중동골 주민 이아무개는 당시 "오전 10시부터 해질녘까지 1시간 간격으로 총살이 집행되었고, 700명이 희생되었다는 말이 돌았다"고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1950년 7월 외신에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이 2대에 트럭에 실려 왕촌 살구쟁이로 이송되는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에서 재소자들은 한 트럭에 50여 명씩 실려 있었다. 그러므로 진실위는 한 번에 100여 명의 재소자가 이송되었다고 추정했다. 당시 중동골 주민 이아무개의 증언대로 오전 10시부터 해질녘인 오후 7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총살이 진행되었다면, 학살 희생자 규모는 700명 이상도 가능 하다고 진실위는 판단했다.
 
당시 공주경찰서 경찰들은 헌병대와 함께 왕촌에서 공주형무소 재소자를 총살하는 데 동원되었다. 공주형무소 형무관 김아무개도 "특별경비대는 이송만 했지, 총살은 CIC가 했다"라며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위와 같은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2010년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공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9일경 최소 400명 이상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공주CIC분견대, 공주파견헌병대, 공주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공주 왕촌 살구쟁이에서 집단살해되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살해한 것으로서 이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국가가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처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참고로 당시 공주형무소 형무관들은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한국전쟁 발발 당시 공주형무소에는 사형수가 한 명도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아, 국가란 무엇인가!

And

이재명, 한다면 합니다.

이재명 지지자들과 이재명을 지지히는 당내외 좌적폐 인사들은 이재명에 대해 "(인성은 더러워도) 일은 잘한다" "한다면 한다"라고 말하며 일 잘하고 소신있는 사람이라고 홍보를 하고 있다.

나는 이들의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그와는 정반대로 인성이 더러울 뿐아니라 일까지 못하며,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쥡듯 뒤집는 소신없는 기회주의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재명이 '한다면 한다'는 말은 일면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이재명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편집증적으로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재명이 편집증적으로 매달리는 듯한 '한다면 한다'에 대해 몇가지를 들어보고자 한다.

1. 이재명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막는 일에 전력을 경주해 해내고 있는 듯하다.

•성남시장 시절 자신을 비판하는 친형 이재선을 자신 정치 행보의 걸림돌로 생각해 정신병원에 감금 시도를 했었다.(검찰 논고)

•성남시장 시절 자신을 비판하는 수많은 민원인들을 고소•고발해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자신의 돈이 아닌 혈세를 펑펑 쏟아부으며 자신 홍보에 매진하고 있는 듯하다.

•이재명은 성남시장 시절 자신 홍보에 어마어마한 혈세를 쏟아부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재명은 마치 대선 준비 전초전을 벌이는 듯 도지사 취임 관련해 자신이 도지사에 취임한다는 소식을 중앙지와 지방지에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이재명은 대선운동을 하둣 타임지와 CNN에 수억의 혈세를 들여 자신 이미지 홍보를 했었다.

3. 이재명은 자신만의 아방궁(?) 확보 계획을 기어코 달성했다.

•이재명은 도지사에 취임하자마자 "아내가 밥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며 남경필이 도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돌려주었던 굿모닝하우스를 도민으로부터 강탈해(?) 관사로 사용할 계획을 간보다 반대 여론에 밀려 그 계획을 취소하는 듯한 발언을 한 후, 연말이 다되어 굿모닝하우스의 적자운영을 빌미로 도민으로부터 이를 강탈해 리모델링을 한 후, 초호화 비품을 입고시키며 2019년 초 굿모닝하우스를 자신만의 아방궁(?)으로 만들었다.

4. 자신의 정책에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 겁박하며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 이재명은 기초자치단체가 자체 재난지원금 지급시 지역상품권으로 지급하라는 경기도의 권고사항을 무시하고 현금으로 지급했던 수원과 남양주시에 대해 특조금 지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양주시에 대해서는 작년 11번의 도정감사를 하며 행정보복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이재명은 경기도의 재난지원금 지급시 보편지급을 하겠다는 자신의 말에 대해 선별지급이 더 효과적이란 의견을 내었던 부천시장에 대해 경기도의 재난지원금을 부천시에는 주지 않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겁박했었다.

5. 이재명은 자신의 정책을 고수하기 위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상식에도 맞지 않게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며 자신의 정책을 지키려하고 있다.

• 이재명은 자신이 대선 어젠더로 밀고 있는 것 같은 보편지급 논리를 지키기 위해 재난지원금 지급시 한정된 재원으로는 선별지급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하는 홍남기 부총리를 시도때도 없이 비판하고 있다. KDI 자료나 IMF에서도 선별지급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재명은 어떤 정책이 입안되는 과정에서는 치열하게 논쟁하고 결정이 되면 그것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2차 재난지원금이 자신의 뜻과 달리 선별지급으로 결정되자 자신의 말을 뒤집고 정부 여당을 향해 저주섞인 악담을 퍼부었다.

• 이재명은 얼마 전 재난지원금 지급시 지역상품권보다 현금 지급이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던 조세연에 대해 '얼빠진 놈' '엄중 문책하라'는 등 주제넘게 막말을 쏟아내며 조세원 연구원을 맹비난했었다.

6. 이재명은 도 재정 부족을 이유로 지자체 중 유일하게 버스비를 인상했었다.

• 이재명은 버스기사들의 주52시간 근무라는 예견된 버스노조 파업 관련해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버스노조 파업이 현실화되자 서울시에 버스요금 공동 인상을 제안했었다. 이에 대해 미리 대비책을 세워놓았던 서울시가 버스비 공동인상에 반대하자 결국 전국 지자체 중 유일하게 버스비 인상을 단행했었다. 이재명은 자신의 무능(?)으로 발생한 버스노조 파업을 잠재우기 위해 버스비 인상이란 자신의 소신(?)으로 버스노조 파업을 막은 셈이 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의견에 대해 편집증적 증세를 보이는 듯하며,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 독재자의 모습을 보이는 이재명이 일은 잘하고 소신있는 사람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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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와 철학

소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옥시 가습기살균제 사건. 2011년 4월부터 산모, 영유아 등이 원인모를 폐질환으로 사망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났고, 계속해서 똑같은 사건들이 연달아 나오자 당시에는 무슨 괴질이 도는 것인지 의아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동안 원인을 모르고 당하고만 있던 피해자들이 무더기로 피해를 호소하고 나왔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출시한 가습기 살균제 동일한 살균제가 출시된 2002년부터 2011년도까지 이유도 알수 없이 건강이 나빠지거나 사망한 사람들까지 추산하면 잠재적 피해자만 수십만명으로 이를 것으로 보인다. 사건 발생 5년이 지난 2016년에서야 전담수사팀이 구성돼, 최대 가해업체인 옥시 대표 등에 대한 처벌(6년)이 이뤄졌다.

"김앤장이 관여"하고… "수임료만 100억"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이번 SK케미칼과 애경산업에 대한 재판의 경우 재판에 넘겨진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피해자 조순미: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 그것이 다 증거인데… (사법부나 가해 기업이나) 용서할 수 없습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이 출시한 가습기 살균제에 첨가된 CMIT와 MIT는, 1960년대말 미국 롬앤드하스사가 개발한 화학물질로 미생물은 물론 세균이 번식하는것을 막거나 죽이는 합성 살충제 및 방부제중하나로, 이것들로 인해 손상된 폐포는 영원히 재생되지 않는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 성분이 들어간 제품을 쓰고 폐 질환 등을 앓게 된 사람들을, 입증 정도에 따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인정하고 있지만

1심 재판부는 1년 6개월 가까운 심리 끝에 CMIT, MIT 성분이 이용자에게 폐 질환과 천식을 유발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환경부와 여러 연구기관의 보고서를 봐도 인과관계를 증명한 내용은 없고, 정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판정은 피해 구제를 위해 기준을 점차 완화해가며 피해자를 폭넓게 인정한 것이어서 엄격한 증명이 필요한 형사 재판에 이를 적용할 순 없다는 이유이다.

신해철 등 해마다 의료사고만도 교통사고 사망자의 두배(1만6천명)에 이르지만 사고입증이 피해자쪽에 있어서 피해자 승소률은 그동안 1%에 불과했다(다만 방송과 시민단체등에서 계속 문제를 제기하자 최근엔 4%로 점차 오르고 부분 승소율은 28%로 오르는 추세이긴하다. 지난해에도 피해자가 수술도중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되는 과정이 다행히 카메라에 찍혀서 승소할 수 있었던 사례도 있다). 그전에는 멀쩡하던 가족이 갑자기 병원에서 사망하는 피해를 당하고도 병원측의 무책임한 억지주장을 반박할 증명방법이 없었다. 그 과실을 입증할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증할 책임을 가해자로 한다든가 카메라를 설치하자는 법률이 국회에 제시되어 있지만 아직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와 결정을 규제하는 것을 형식이라고 한다. 형식에는 절차와 규제하는 법(규칙)이 있고 과학과 수학에는 이에 따른 공식이 있다. 하지만 형식이라는 것도 결국은 관례나 인간의 관점에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심지어 수학적 논리도). 이들이 의지를 가지고 적용하자면 형식(폼)을 만들어서라도 적용하지만(국회는 형식을 만드는 입법기관이다) 법원은 기존의 형식을 발견할 수 없어서 판결을 내릴 수 없다고 하거나 또는 다른 형식에 따라 그렇게 판결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 이춘재의 죄를 뒤집어 쓰고 20여년간 옥살이를 한 윤씨 사건의 경우 피해자는 있는 데 가해자가 바꿔진 경우이지만 이번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백하지만 그 인과관계란 형식적 과정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신중론을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모든 과학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실험결과가 우리가 잘 모르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결과물질이 나왔는데 우리가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결과가 그 실험과정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나라 법관들의 무식함이 관행으로 굳어진 것이며, 우리는 잘못된 관행이 반복되면 상식이나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그것이 법칙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습관적으로 수행(반복)하기 때문에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사람들은 그것이 쿠데타든 몰상식이든 권위있는 기관이나 언론, 자신의 지배자(목사) 내린 결정을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지만, 단지 그 결정(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판단기준이)이 상식이나 이성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믿음(맹신)이라든가 힘(의 논리)이 작용하고.. 그러나 금권에 의해 비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이러한 상식들마저 힘의 논리에 의해 이미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내가 당하기 전에는 이런 부정과 위협에 대해서 둔감할 수 밖에 없지만('죽음은 아직 나에게 닥치지 않았다'처럼) 사회에 이런 부정의가 만연하다면 이는 결국 반드시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더 근본적으로 제도와 관행, 관습들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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