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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3
    강남순교수
  2. 2020.10.23
    고일석기자
  3. 2020.10.23
    반역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하여 ‘함께’--‘다름의 연대’를 향하여>

1.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이나 현상들을 보면서, 지난해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석·박사과정의 학생들이다. 그중에는 다양한 NGO에서 사회정의 문제에 깊숙이 개입되어 일해 온 사람들, 또는 변호사, 중고등학교 교사, 바텐더 등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공부를 병행하고 있는 이들도 꽤 있다. 한국의 신학대학원이 주로 목회자나 교수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는 정황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가르치는 코즈모폴리터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알리즘, 페미니즘, 그리고 데리다 세미나와 같은 과목들에는 영문학이나 국제학 등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대학원 학생들도 종종 들어온다.

2. 어느 날 학생 발제가 끝나고 질문 시간이 되었다. NGO활동가로서 오랫동안 일해오던 한 흑인 학생이 맨 먼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기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 되었는데, ‘성적 지향’이라는 말을 자신이 평생 들은 것보다 더 많이 들었다” 면서 “성소수자 문제는 백인들에게 해당되는 사치스러운 주제”라는 코멘트를 했다. 그는 50대 중반의 학생이며 매우 열정적으로 다양한 인종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일해온 NGO 활동가다. 그러자 성소수자의 권리문제에 열심히 활동해 온 한 학생이, ‘성소수자 문제가 백인들의 사치스러운 주제’라고 한 것에 화가 나서 그 흑인 학생을 향한 즉각적 비판을 했다. 그 학생 자신은 성소수자가 아닌 ‘백인·30대 ·남성’이었다. 이 두 사람은 각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의’문제를 가지고 서로 음성을 높이며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한 비판을 던지다가, 급기야 백인 학생이 ‘더 이상 여기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며 컴퓨터를 덮고 책가방을 싸는 것이었다. 열 명 남짓한 세미나에서 돌연히 긴장된 분위기가 강의실을 채웠다.

3. 대개 대학원 세미나의 토론에서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서로 응답을 하라고 초대하지 않는 이상 학생들끼리 즉각적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광경이었기에 다른 학생들은 할 말을 잃은 채, 두 사람과 교수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책가방을 싸고 있는 학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공 (Egon),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조용히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랬더니 멈칫하며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발제자와 질의응답 하는 시간에 나는 계획에 없었던 즉흥강의를 해야 했다.

4. 이 두 학생의 갈등 장면은 어쩌면 나의 강의실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이다. 미국 역사에서 흑인들이 인종차별의 주희생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인종차별’이라는 하나의 렌즈만을 절대화할 때, 예를 들어서 그 흑인들 안에 존재하는 성차별이나 계층차별, 또는 성소수자 차별의 문제는 외면하게 된다. 또한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성소수자 운동안에서, 비백인 성소수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음으로써 담론과 운동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내적 인종차별’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두 학생 모두 차별에 저항하는 이들로서 충분한 연대를 나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인가 '성적지향'인가 중 하나의 렌즈만 절대화시킴으로써 하나의 현상이 담고 있는 매우 복합적인 구조를 보지 못하는 ‘인식의 사각지대’를 드러내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들여다보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변혁에 관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제는 하나의 절대화된 렌즈가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 렌즈를 작동시켜야 한다. 인종, 젠더, 성적지향, 장애, 계층, 학력, 나이, 외모, 인간이해 등 여러 렌즈의 동시적 작동은 인권의 범주가 확장되고 있는 이 현대사회에서 더욱 절실한 과제가 되고 있다.

5.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계는 다양한 얼굴의 억압과 차별의 문제가 있다. 성차별, 인종차별, 계층차별, 장애차별, 성적(sexual) 차별, 나이차별, 종교차별, 언어차별, 외모차별 등 차별의 리스트는 점점 늘어간다. 그래서 21세기의 인권의 적용범주와 이해는 16-17세기, 또는 18-19세기의 인권에 대한 이해와 매우 다르다. 한 종류의 차별 문제에 대한 예민성이 있다고 해서, 다른 문제에 자동적으로 그 인지와 예민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다층적 이론들을 학습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 각자가 인식의 확장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문제에 대하여 무지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입장만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6. 한 인간은 전적으로 ‘성인’이거나 또는 전적으로 ‘악마’가 아니다. 서구사상사의 인간이해를 들여다보면 계몽주의 시대처럼 인간에 대한 매우 낙관적 이해가 지배하던 때도 있고, 세계 대전 후 처럼 고도의 비관적인 이해가 지배하던 때도 있다. 그런데 한 인간이란 이 두 측면을 모두 품고 있다. 어떤 정황에서는 인간의 고귀성을 드러내고, 동일한 사람이 또 다른 정황에서는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복합적인 이해를 결여한 사회변혁운동은 한 사회학자가 지적한 “오늘의 열광자가 내일의 압제자가 된다”라는 경고를 하게 만든다. 어떠한 억압이나 차별의 문제들을 마주할 때, 성급한 결론 내리기 전에 지난한 인내심을 작동시키면서 복합적인 방식으로 조명하면서 잠정적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측면을 전체로 부각시키면서 인간을 ‘순결한 피억압자/피해자’거나 또는 ‘구제불능의 악마적 억압자/가해자’로 만들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7. 마틴 루터 킹은 인종차별 극복운동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한 인간이기에 무흠한 ‘성인’이 아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인종적 평등을 위한 그의 업적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해서, 역사적 사료들을 통해서 밝혀진 그의 성혐오나 성차별적 언행들까지 미화해서는 안된다. 거꾸로 그의 성차별적 언행들이 밝혀졌다고 해서, 그가 남긴 중요한 유산을 모두 무화시켜서도 안된다. 세계평화를 향한 프로젝트로서의 칸트의 코즈모폴리턴 권리 개념은 21세기에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서 모든 인간의 권리를 확장하는 정치적·도적적 인식확장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가 지녔던 여성혐오나 백인 우월적 인종이해를 덮어두어서는 안된다. 소중한 업적은 업적으로 그 유산을 지켜내고, 오류는 오류로 비판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숙한 시민사회가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과정에서 지니고 있어야 한 태도다.

8. 예상에 없었던 이러한 즉흥강의가 끝나고 나서, 10분 동안 휴식 시간을 가지겠다고 했다. 그러자, ‘적대자’ 처럼 서로에게 분노하던 두 학생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에게 다가가더니, 악수를 청하고 ‘화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교환했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나는 학생들에게 오늘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라고 물었다.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 익숙한 문화에서 살아온 학생들은 예기치 않았던 이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 각자 여러 가지를 배웠다고 한다. 1) 서로의 각기 다른 해석들에 대하여 ‘인내심’을 작동시키면서 기다리고 해석이나 입장의 상이성에 대하여 성찰해야 한다는 것; 2) 특정한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과 실천은 무엇보다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복합적 이해가 동반되지 않으면 인간을 흑과 백으로 나눔으로서 인간이 지닌 다층적 측면을 간과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또 다른 억압과 배제의 장치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 3) 다양한 얼굴의 차별문제들, 그리고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지속적인 자기학습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 4) 어떤 이론이든 운동이든, 종교든 철학이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적대심의 발현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품고 있는 '함께 살아감'으로서의 연민(compassion)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9. 나는 나의 이 두 학생사이에 순간적으로 일어났던 적대적 시선의 교환이, 자신의 인식의 사각지대를 조금씩 인식하면서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개입하는 ‘동지’라는 ‘연대의 원’ 속으로 서서히 전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와 보람을 느꼈다. 내가 한국 사회에서도 보고 싶은 장면은 바로 이러한 ‘연대의 원’을 확장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관점과 해석의 ‘동질성’을 공유해서만이 가능한 ‘동질성의 연대(solidarity of sameness)’는 지독한 한계와 위험성마저 있다. 접근방식과 해석의 다름에 대하여 인내심있게 경청하고, 그 다름을 정죄가 아닌 긍정의 태도로 기반하는 ‘다름의 연대(solidarity of alterity)’를 구성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을 때, 불필요한 삶의 에너지 낭비를 하게 되며, 결국 한 개별인이든 집단이든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를 위한 개입의 궁극적 지향점을 상실하게 된다.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 대한 따스한 연민의 시선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차별과 배제에 대한 성찰적 비판 그리고 변혁에의 요청이 가능한 연대를 부단하게 연습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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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감이 너무 약했다고 민주당 탓하시는 분들이 보이는군요. 그렇게 보셨다면 뭐 할 수 없겠지만,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하고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던 제가 보기에는 민주당 아주 잘했습니다.

1. 수사지휘권 불법 운운은 대통령에 대한 거역이라고 일갈한 김종민 의원

2. 야당 정치인 관련 내용이 사전이든 사후든 정식 계통으로는 전혀 보고되지 않았고 기록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단답형 질문으로 탁탁 짚어낸 김용민 의원

3. 윤갑근 수사가 뇌물 혹은 수임료를 지불한 당사자 조사 외에는 모든 수사를 다 했다면서 정작 윤갑근은 한 번도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해낸 백혜련 의원

4. 조선일보 방상훈과의 회동 관련 질문에 윤석열이 "거기 뭐 수사받던 거 있었나요?"라고 묻자 "저기를 보시죠" 하면서 조선일보 수사 리스트 펼쳐보여준 박주민 의원

5. 지난 번 국감에서 윤석열이 호언했던 전관예우 근절 의지가 말 뿐이었다는 것을 추궁한 김남국 의원. 그리고 김남국 의원은 조국 전 장관 전격 압수수색이 대통령 임명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도 확실하게 짚었죠.

5. 옵티머스 무혐의 처리 건은 여러 의원들이 떼거지로 붙어서 윤석열을 완전히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번 국감은 옵티머스 하나만으로도 KO승이었습니다.

윤석열이 오줌을 질질 싸면서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기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는 심야시간대로 넘어가서는 윤석열이 완전히 오줌을 지리면서 헛소리만 내뱉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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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때때로 일어나는 작은 반란은 좋은 현상이다. 

성공만이 반란을 정당화할 수 있다.

자신의 군주를 상대로 칼을 뽑는 자는 칼집을 던져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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